엔히크 항해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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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히크 항해왕자는 1394년 포르투갈의 주앙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세우타 정복(1415년)에 참여하여 비제우 공작으로 임명되었고, 1420년에는 그리스도 기사단장이 되어 해양 탐사를 지원했다. 엔히크는 아프리카 해안 탐험을 후원하고 라틴 세일을 갖춘 캐러벨을 개발하여 항해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탕헤르 원정(1437년) 실패 이후에도 해양 탐사를 지속했다. 그는 마데이라 제도, 아조레스 제도의 식민화를 추진하고,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시작하는 등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이끌었으나, 알파로베이라 전투에서 섭정 페드루가 사망하고, 1460년에 사망했다. '항해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탐험과 과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지만, 낭비벽과 사생활 문제로 비판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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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히크 항해왕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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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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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인판테 동 엔히크 지 아비스 |
별칭 | 항해왕자 (O Navegador) 사그레스의 왕자 (Infante de Sagres) |
출생일 | 1394년 3월 4일 |
출생지 | 포르투, 포르투갈 |
사망일 | 1460년 11월 13일 |
사망지 | 사그레스, 포르투갈 |
매장지 | 바탈랴 수도원 |
가문 | 아비스 가 |
아버지 | 주앙 1세 |
어머니 | 랭커스터의 필리파 |
칭호 | 비제우 공작 |
경력 | |
비제우 공작 재위 | 1415년 – 1460년 |
선임자 | (신설) |
후임자 | 페르난두 지 비제우 공작 |
2. 어린 시절
엔히크 왕자는 1394년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와 잉글랜드 왕녀 필리파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포르투에서 태어났다.[3] 친형 두아르테, 페드루 왕자와 함께 국왕 부부의 관심 속에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아버지 주앙 1세는 아비스 기사단장 출신으로, 페르난두 1세 사망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지지를 받아 포르투갈의 독립을 지켜냈다. 1385년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카스티야를 격퇴시킨 후 코임브라 궁정회의를 통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31]
어머니 필리파는 잉글랜드 랭커스터의 곤트의 존의 딸로, 1386년 포르투갈과 잉글랜드 간의 동맹을 맺은 후,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해 1387년에 주앙 1세와 결혼하였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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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왕자 엔히크의 조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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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폰수 4세[27] | 페드루 1세[25] | 카스티야의 베아트리스[27] |
주앙 1세[25] | ||
로렌수 마르틴스[28] | 테레사 로렌수[25] | 산차 마르틴스[28] |
항해 왕자 엔히크 | ||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26] |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26] | 에노의 필리파[26] |
랭커스터의 필리파[26] | ||
랭커스터 공작 헨리 오브 그로스몬트[26] | 랭커스터의 블랑슈[26] | 보몽의 이사벨[26] |
21세 때인 1415년, 엔히크는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북부 모로코의 세우타를 점령했다. 세우타는 오랫동안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였으며, 이들은 포르투갈 해안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납치해 아프리카 노예 시장에 팔았다.[6] 세우타 정복 이후, 엔히크는 유럽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해안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서아프리카 금 거래의 기원을 찾고, 전설적인 기독교 왕국인 프레스터 존을 찾는 것, 그리고 포르투갈 해안에 대한 해적 공격을 막는 것이었다.[6]
1419년, 아버지 주앙 1세는 엔히크를 알가르브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2. 1. 비제우 공작
1415년, 주앙 1세는 세우타 정복의 공로를 치하하며 엔히크 왕자에게 비제우 공작위를 하사하였다.[32] 1436년 3월, 엔히크는 탕헤르 원정을 추진하고자 자신의 전 재산을 조카 페르난두에게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작성하였다.[32] 페르난두는 국왕 두아르테 1세(엔히크의 친형)의 둘째 아들이다. 1437년 탕헤르 원정은 실패했으나, 엔히크 사후 비제우 공작위는 조카 페르난두에게 상속되었다.2. 2. 그리스도 기사단장
1420년 5월, 주앙 1세에 의해 그리스도 기사단의 단장으로 임명되었다.[33][34] 그리스도 기사단은 포르투갈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막대한 부와 강력한 힘을 가진 엘리트 그룹이었다.[33] 성전기사단의 후신인 그리스도 기사단은 본래 교황청 소속이며 교황과 기사단장의 명령에만 절대 복종하는 조직으로, 단장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리스도 기사단장이 된 엔히크는 기사단의 재정을 해양 탐사에 전용하였으며, 기사들은 엔히크의 명령에 따라 말을 버리고 해양 탐사선을 타기 시작했다.[37]1420년 5월 25일, 엔히크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9] 기사단은 엔히크의 해양 탐험 계획에 중요한 자금원이었다.
3. 해양 탐사
1419년 주앙 곤살베스 자르쿠와 트리스탕 바스 테이셰이라가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고 이듬해부터 식민지화가 시작되면서, 엔히크 왕자의 해양 탐사는 첫 성과를 거두었다.[38][39] 1427년에는 디오고 드 실베스가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했다.[46]
유럽인들에게 카나리아 제도 남쪽 200km 지점에 있는 Cape Bojador|보하도르 곶영어이 아프리카 해안의 최남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뱃사람들은 보하도르 곶 너머에 세상의 끝이 있고 끓어오르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는 미신을 믿었고, 이 공포 때문에 보하도르 곶을 넘어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엔히크 왕자는 1422년경부터 이 미신에 도전하여 여러 차례 탐험대를 보냈으나 실패했다. 1434년 질 이아네스가 이끄는 탐험대가 보하도르 곶을 돌파하면서 오랜 미신이 깨졌고, 이는 이후 미지의 땅으로 탐험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1433년 사망한 주앙 1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엔히크 왕자의 형 두아르테 1세는 보하도르 곶 너머 새로운 발견지에서 얻는 상업 이익의 5분의 1을 엔히크 왕자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1441년 누누 트리스타웅과 안타웅 곤살베스는 현재 모리타니 해안의 Ras Nouadhibou|label=블랑코 곶영어에 도달했다. 1443년에는 Bay of Arguin|아르귄 만영어에 도착하여 1448년에 이 지역에 포르투갈 요새를 건설했다. 1444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아버지인 디니스 디아스가 세네갈 강과 베르데 곶에 도달하여 기니를 방문하고 사하라 사막 남쪽 끝에 도달했다.
1444년부터 1446년까지 약 14척의 탐험선이 라고스 항구에서 출항했다. 1450년대에는 카보베르데 군도가 발견되었고, 1460년에는 오늘날 시에라리온 해안까지 탐험이 이루어졌다.
3. 1. 해양 탐사 사업 추진 배경
엔히크 왕자가 해양 탐사 사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1415년 세우타 정복 이후, 포르투갈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37] 서유럽의 변방 국가로서 지정학적 한계를 지닌 포르투갈은 세력 확장, 대외 진출, 무역 등에 어려움을 겪었다.[37] 이러한 상황에서 주앙 1세는 해양 탐사와 개척을 통해 미래에 대한 투자와 가능성에 도전하고자 했다.[37]초기 해양 탐사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경제적 수익은 거의 없어 반대 여론이 많았다.[37] 그러나 주앙 1세의 적극적인 지지와 1433년 그의 사후 즉위한 친형 두아르트의 지원으로 탐사는 계속될 수 있었다.[37] 1437년 탕헤르 원정 실패와 1438년 두아르트 국왕의 사망으로 잠시 정체되기도 했지만, 아폰수 5세 시절에도 해양 탐사 지원은 이어졌다.
1440년대에 들어 흑인 노예 무역과 금 거래가 시작되자, 해양 탐사에 대한 비난 여론은 점차 줄어들었다.[128] 그러나 엔히크 사후에는 미개척지 탐사에 대한 추가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미 개척된 지역과의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엔히크의 해양 탐사에는 둘째 형 페드루 왕자의 영향도 컸다.[48] 유럽 여행을 통해 지리에 대한 관심을 키운 페드루 왕자는 이탈리아에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사본을 가져와 엔히크에게 번역해 주었다.[132]
또한, 엔히크는 1420년 그리스도 기사단의 단장으로 임명되면서,[33][34] 기사단의 막대한 재정을 해양 탐사에 활용할 수 있었다.[37]
3. 2. 서대서양 탐사
1419년, 주앙 곤살베스 자르쿠와 트리스탕 바스 테이셰이라가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고, 다음 해부터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이는 엔히크의 사업 중 첫 번째 성과였다.[38][39]1427년, Diogo de Silves|디오고 드 실베스pt가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하고, 이후 이 제도에서 곤살루 벨류 카브랄 등이 탐험을 했다.[46]
엔히크 시대까지 유럽인에게 알려진 아프리카 해안의 최남단은 카나리아 제도에서 20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Cape Bojador|보하도르 곶영어이었다. 당시 항해자들은 보하도르 곶 너머에는 세상의 끝이 있고 끓어오르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믿어 이 미신에 대한 공포가 대단했다. 때문에 보하도르 곶을 넘어 항해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엔히크는 1422년경부터 이 미신에 계속 도전했고, 여러 번 탐험대를 파견했지만 실패를 반복했다. 1434년, 엔히크가 질 이아네스에게 파견한 탐험대에 의해 이 곶이 돌파되었고, 이로 인해 항해자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미신이 깨졌다. 이는 이후 미지의 땅으로의 탐험을 촉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3. 3. 페드루 왕자의 도움
엔히크의 해양 탐사에 둘째 형 페드루 왕자의 영향도 컸다.[48] 1425년에 유럽 여행을 떠난 페드루 왕자는 잉글랜드, 플랑드르, 독일, 헝가리, 몰다비아 및 왈라키아 공국(지금의 루마니아)들을 방문하고 이탈리아와 아라곤, 카스티야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지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원거리 여행을 떠나는 대부분의 유럽인 여행자들의 본거지였던 이탈리아에서 그런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페드루는 1428년에 이탈리아에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인 《동방견문록》 사본을 포르투갈로 가져와 동생 엔히크를 위해 번역해 주었다.[132]3. 4. 캐러벨의 탄생
엔히크는 라고스 항구를 전진 기지로 하여 조선소를 설립하고 해양 탐사에 적합한 새로운 선박 개발을 추진하였다. 기존 선박들은 주로 노를 젓는 방식이었는데, 거친 대서양의 폭풍과 파도에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이 강하고 바람을 이용한 원양 항해용 범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노력 끝에 아랍인들이 사용하는 다우선을 응용하여[49] 포르투갈식 범선이라고 할 수 있는 캐러벨(Caravel)을 개발했다.[50][37]
이 배는 기존의 사각형 돛을 사용하는 '바르카'보다 규모는 작지만 세 개의 삼각돛(Lateen sail)[51]을 이용하여 맞바람(역풍)을 맞으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49][52] 길이는 약 21m, 너비는 7m~8m, 승선 인원은 20여 명으로 50톤 규모였다.[53] 배가 물에 잠기는 흘수선(吃水線, water line)이 얕아 탐사를 목적으로 한 연안 항해에 적합한 원양 탐험선이었다. 개발된 캐러벨은 향후 해양 탐사에서 매우 큰 역할을 했으며, 이 배가 있었기에 포르투갈의 해양 탐사가 성공할 수 있었다.
3. 5. 보자도르 곶 정복
보자도르 곶은 '죽음의 곶'이라 불리며 항해의 금단 영역으로 여겨졌다.[37] 북위 26도 선에 있는 보자도르 곶을 지나 그 이남 지역으로 항해한 배 중에 살아서 돌아온 이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37] 이 때문에 보자도르 곶 이남에는 바닷물이 끓기 시작한다거나 하는 여러 미신이 당대 유럽의 뱃사람들에게 존재하였고,[54] 그런 공포가 무지를, 무지가 다시 좀 더 큰 공포를 만들어냈다. 엔히크는 이런 보자도르 곶 정복을 제1 목표로 삼았다.[37]14차례가[55] 넘는 시도 끝에 1434년 질 이아네스가 드디어 보자도르 곶을 돌아 생환하는 쾌거를 올렸다. 미신을 좋아하는 뱃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바닷물이 끓지도 않았고 괴물이 살고 있지도 않았으며 다만 북위 26도를 지나면서부터 바뀌는 강한 해류와 바람이 존재하였던 것이다.[56]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개량된 캐러벨의 우수함 때문이었고, 보자도르 곶 정복은 사그레스에 자리 잡은 이후 시작된 대양 탐사 초기에 이룩한 가장 큰 업적 중 하나였다.
3. 6. 아프리카 해안 개척
엔히크 왕자가 주도하는 해양 탐사는 1415년 세우타 정복 이후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아버지 주앙 1세의 지지로 지속되었다. 포르투갈은 서유럽 변방 국가로,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양 탐사를 돌파구로 삼았다.[37]1433년 주앙 1세 사후, 형 두아르트의 지지가 이어졌다. 1437년 탕헤르 원정 실패와 1438년 국왕 사망으로 정체되기도 했으나, 조카 아폰수 5세 시대에도 지원은 계속되었다. 1440년대 흑인 노예무역과 금 거래가 시작되며 비난은 줄었지만, 엔히크는 사망 시 많은 부채를 남겨 사후 탐험 투자는 중단되고, 이미 개척된 지역과의 무역이 활성화되었다.[128]
1424년, 보자도르 곶은 유럽인들이 알던 아프리카 서해안 최남단이었다. 뱃사람들은 곶 너머에 괴물과 세상 끝이 있다고 믿었으나, 엔히크는 10년간 15차례 원정대를 보내 이 미신에 도전했다. 1434년, 질 이아네스가 보자도르 곶을 통과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운 선박을 이용해 원정대는 계속 전진했다. 1441년 누누 트리스타웅과 안타웅 곤살베스는 블랑코 곶에 도달했다. 1443년 아르귄 만 발견 후, 1448년경 아르귄 섬에 요새-상사를 건설했다. 디니스 디아스는 1444년 세네갈 강을 발견하고 베르데 곶 반도를 돌았다. 이로써 사막 남쪽 경계를 넘어, 포르투갈은 서부 사하라 사막을 가로지르는 무슬림 육상 무역로를 우회하게 되었다. 노예와 금이 유입되며 포르투갈은 부유해졌고,[21] 1452년 최초의 금화 ''크루자두''가 주조되었다. 1444년부터 1446년까지, 엔히크를 대신하여 40척의 배가 라구스에서 출항, 최초의 사설 상업 원정이 시작되었다.
알비제 카다모스토는 1453년에서 1456년 사이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을 탐험, 카보베르데 제도 여러 섬을 발견했다. 1455년 첫 항해에서 마데이라 제도와 카나리아 제도를 방문했고, 1456년 두 번째 항해에서 카보베르데 제도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안토니우 노리는 나중에 공로를 주장했다. 1462년까지 포르투갈은 현재의 시에라리온까지 탐험했다. 28년 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희망봉에 도달, 아프리카 항해 가능성을 증명했다. 1498년, 바스쿠 다 가마는 바닷길로 인도에 간 최초의 유럽인 항해사가 되었다.
1419년에는 주앙 곤살베스 자르쿠와 트리스탕 바스 테이셰이라에 의해 마데이라 제도가 발견되어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1427년에는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하고, 이후, 이 제도에서 곤살루 벨류 카브랄 등이 탐험을 했다. 1434년에는 질 에아네스가 파견한 탐험대에 의해 보하도르 곶이 돌파되었고, 이로 인해 항해자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미신이 깨졌다.
1433년에는 주앙 1세가 사망하고, 엔히크의 형 두아르테 1세가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했다. 두아르테 1세는 보하도르 곶 이원지의 새로운 도달 지점에서 상업상의 이익 중 5분의 1을 엔히크에게 지불할 것을 약속했다. 1437년에는 북아프리카의 탕헤르에 파병했지만, 이슬람 세력에게 완패하여 실패했다. 1438년에는 두아르테 1세가 사망하고, 불과 6세의 아폰수를 아폰수 5세로 즉위시키고 섭정이 된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와 함께 그를 지지했다.
1441년에는 누누 트리스타웅과 안타웅 곤살베스가 현재 모리타니 해안에 위치한 블랑코 곶에 도달했다. 1443년에는 아르귄 만에 도달하여, 1448년 이 땅에 포르투갈의 요새를 건설했다. 1444년에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아버지인 디니스 디아스가 세네갈 강과 베르데 곶에 도달했다. 기니를 방문함과 동시에, 사하라 사막의 남단에 도달했다.
1444년부터 1446년에 걸쳐, 약 14척의 탐험선이 라고스 항구에서 출항했다. 1450년대에는 카보베르데에서 군도가 발견되었고, 1460년에는 탐험이 오늘날 시에라리온 해안까지 도달했다.
4. 세우타 정복
1414년, 21세가 된 엔히크는 아버지 주앙 1세와 함께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 이슬람 세력의 도시 세우타 공략에 나섰다. 이듬해 8월, 세우타 정복에 성공하며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엔히크는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기사 작위를 받았고, 주앙 1세는 비제우 공작 작위를 신설하여 그에게 하사했다.
세우타에서 엔히크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을 듣고, 사하라 사막을 넘는 대상 등 이슬람 무역을 접했다. 그는 이슬람 상인을 거치지 않고 금과 향신료를 얻을 새로운 길, 즉 아프리카 서안과 인도 항로 개척의 야망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4. 1. 배경
1385년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승리하여 포르투갈은 카스티야로부터 독립을 지켜냈고, 주앙 1세가 즉위하면서 아비스 왕조가 시작되었다.[57] 이후에도 카스티야의 침공이 계속되었으나, 1411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58]이러한 전란 기간 동안 귀족 계급은 붕괴하였고, 주앙 1세를 지지한 신흥 부르주아지 세력이 성장했다.[58] 이들은 경제 부흥을 위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주앙 1세는 중앙집권을 강화해야 했다.[59]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앙 1세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지중해 무역항 중 하나인 세우타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63]
4. 2. 침공
1385년 알주바로타 전투에서 승리하여 포르투갈은 독립을 지켰고, 주앙 1세가 국왕으로 추대되면서 아비스 왕조가 시작되었다.[57] 그러나 카스티야의 침공은 계속되었으며, 1411년에야 양국 간 조약이 체결되어 평화가 찾아왔다.[58]주앙 1세는 서자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60] 국력을 모아 중앙집권을 이루어야 했다.[61] 또한 장성한 왕자들은 능력을 발휘하여 지도력을 검증받고 싶어했다.[60] 이에 주앙 1세는 왕세자 두아르트와 논의하여 상업과 전략적 요충지인[62] 모로코의 세우타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58] 세우타는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번영하는 지중해 무역항 중 하나였다.[63] 이교도의 땅이었으므로, 건국 정신을 계승하여[59] 기독교 세력을 넓힌다는 명분도 있었기에 교회로부터 호응도 얻을 수 있었다.
1415년 8월 21일, 4년간의 준비 끝에 군함 200척과 20,000명의 원정대가[62]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에 있는 세우타를 기습 공격했다. 주앙 1세를 비롯한 3명의 장성한 왕자들이 모두 참전하였고, 왕세자 두아르트가 직접 상륙작전을 지휘했다. 엔히크 항해왕자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투에 임하며 큰 공을 세웠다. 전투는 10시간 넘게 이어졌으며, 8월 22일 아침, 세우타는 포르투갈의 수중에 들어왔다. 정복에 성공하자 주앙 1세는 그곳에서 왕자 3명을 모두 기사로 서임하였다.[64] 또한 세우타 관련 일은 셋째 엔히크 항해왕자에게 모두 맡겼다.[64] 9월 초, 3,000명의 수비대를 남겨두고 본진은 귀국하였다.[64]
4. 3. 정복 이후
1415년 세우타 정복은 성공적이었고, 주앙 1세는 그곳에서 왕자 3명을 모두 기사로 서임하였다.[64] 또한 세우타 관련 일은 셋째 엔히크에게 일임했다.[64] 1418년과 1419년에 모로코의 마리니드 왕조는 세우타를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1420년 마리니드 술탄이 암살되며 모로코는 이후 몇 년간 정치적 혼란기를 거쳤고,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요새화하고 안정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다.세우타는 포르투갈 역사상 처음으로 얻은 해외 영토로서 15세기 말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아프리카 진출을 위한 교두보라는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었다.[65] 아랍 상인들을 통해 아프리카 연안의 대서양과 내륙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이는 해양 탐험에 큰 도움이 되었다.[62] 모로코와 그라나다의 교통을 차단하여 이베리아반도의 방어에 큰 도움이 되었고, 세우타를 기점으로 출몰하는 사라센 해적들을 저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66] 새로운 기항지 제공과 지브롤터 해협을 항해하는 기독교 선박을 보호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알카세르세게르(1458년), 아르질라, 탕헤르(1471년) 정복 이전까지는 포르투갈의 세금만 축내는 땅이 되고 말았다. 모로코에 의해 고립되면서 더 이상 무역항으로서 번성하던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67] 이로 인해 탕헤르 원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5. 탕헤르 원정
1415년 세우타를 점령한 포르투갈은 모로코의 마리니드 왕조로부터 세우타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실패했다. 1420년 마리니드 술탄이 암살되면서 모로코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고, 이 틈을 타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요새화하고 안정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다. 세우타는 포르투갈 최초의 해외 영토로서 대항해시대 아프리카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지만,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막대한 주둔군 유지 비용만 발생시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67] 모로코가 탕헤르를 대체 교역로로 활용하면서 세우타는 고립되었고, 이에 탕헤르 점령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엔히크 항해왕자는 탕헤르 원정을 제안했지만, 두아르트를 비롯한 왕자들은 인력 부족과 비용 문제를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엔히크는 모로코의 정치적 분열을 기회로 삼아 탕헤르와 아실라 등 주요 항구 도시를 식민지화하고, 교황의 특권을 받아 유럽 전역에서 기독교 군인을 모집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1433년 주앙 1세가 사망하고 두아르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원정 논의는 중단되었지만, 엔히크는 페르난두를 끌어들이고 왕비를 설득하여 1436년 3월, 국왕의 승인을 얻어냈다.
1436년 4월, 국왕은 에보라에서 코르테스(의회)를 열어 원정 자금을 마련했고, 엔히크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로부터 칙령을 받아냈다. 1437년 늦여름, 6,000명 규모의 포르투갈 원정대가 준비되었으나, 반대 여론으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절반 수준의 병력만 모집되었다. 모로코는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의 침공에 대비하여 탕헤르 요새를 보강하고 주변 산길을 봉쇄했다.
1437년 8월, 엔히크 왕자는 원정대를 이끌고 탕헤르로 향했다. 9월 13일 탕헤르 외곽에 도착하여 세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0월 9일, 모로코 지원군이 도착하여 전투가 벌어졌고, 포르투갈 군은 크게 패배하여 3,000명 정도만 살아남아 포위되었다. 보급이 부족해 절박한 상황에 놓인 포르투갈 군은 말을 잡아먹기도 했고, 우물도 턱없이 부족했다.
1437년 10월 17일, 엔히크는 군대의 안전 철수를 보장받는 대가로 세우타 반환을 약속하는 종전 조약을 체결했다. 인질 교환 후 10월 19일 포르투갈 원정대는 탕헤르를 떠났으나, 인질 중에는 엔히크의 막내동생 페르난두 왕자가 포함되어 있었다.[94][95]
귀국 후 엔히크는 조약 파기를 주장했지만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두아르트 국왕은 레이리아에서 코르테스(의회)를 소집하여 논의했으나, 의회는 조약 비준을 반대했다. 이후 페르난두 왕자의 석방을 위한 노력이 실패하면서, 세우타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페르난두는 1443년 6월 5일 모로코에서 사망했다.[99][100]
5. 1. 배경
세우타 점령은 여러 이점이 있었지만, 무역항 역할을 상실하면서 막대한 주둔군 유지 비용만 발생시켜 포르투갈 국고를 탕진하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모로코는 세우타 대신 탕헤르를 교역로로 이용하여 세우타는 고립되었다. 탕헤르 점령 없이는 세우타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포르투갈 내에서는 군대 철수 및 세우타 포기 여론이 힘을 얻었다.[68]5. 2. 원정 제안
탕헤르 원정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엔히크 왕자였다.[69] 1432년, 왕실 평의회는 국왕 주앙 1세에게 반대 의견을 전달했으며, 왕세자 두아르트도 나머지 3명의 왕자와 함께 원정에 반대했다. 인력 부족과 정복 및 유지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 조달 등을 이유로 정복의 목적, 성공 가능성, 실효성 등을 문제 삼았다.[70] 이에 대해 엔히크는 현재 모로코 마리니드 왕조가 심하게 분열되어 지도부가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1420년 술탄이 암살된 후 모로코는 정치적 혼란 속에 있었고, 어린 술탄 압드 알 하크 2세가 성년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섭정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권력 투쟁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71] 엔히크는 모로코의 분열은 좋은 기회이며 탕헤르와 아실라 등의 주요 거점 항구 도시 몇 개만 식민지화하면 충분하고, 교황으로부터 원정에 대한 특권을 받아내면 유럽 전역으로부터 기독교 군인을 모집하여 인력 공백을 메꿀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72]
원정 계획을 검토하던 주앙 1세가 1433년 사망하자 논의는 중단되었다.[73] 왕위를 계승한 장남 두아르트는 원정을 반대했지만, 엔히크는 계속 로비를 벌였고 상속받은 영지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막내 동생 페르난두를 끌어들였다.[74] 이로써 원정에는 자신이 단장으로 있는 그리스도 기사단[75]과 막내동생이 단장으로 있는 아비스 기사단이 주축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왕비(형수)에게 접근하여 국왕을 설득하도록 부추겼다. 독신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둘째 조카(국왕의 둘째 왕자 페르난두)에게 상속하겠다는 유언장을 1436년 3월에 작성하자[76] 국왕 두아르트는 원정을 승인했다.[77]
5. 3. 전쟁 준비
1436년 4월 중순, 국왕 두아르트는 에보라에서 코르테스(의회)를 열어 원정 자금을 마련하였다.[78] 엔히크는 교황청을 상대로 로비를 펼쳐[79] 1436년 9월, 교황 에우제니오 4세로부터 칙령(''Rex Regnum'')을 받아내었다.[80] 1437년 늦여름, 1년간의 준비 끝에 포르투갈 원정대가 준비되었다. 원정대는 기사 3,000명, 보병 2,000명, 궁수 1,000명으로 총 6,000명 규모였으나, 반대 여론으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절반 수준의 병력만 모집되었다.[82]모로코는 정치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지난 1년간 포르투갈의 원정 준비에 맞서 침공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마리니드 왕국의 수도 페즈에서는 섭정 아부 자카리아가 국민 통합과 성전을 호소했다. 지난 15년간 모로코는 지방 분권 심화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지방 총독들은 아부 자카리야의 호소에 부응하여 전쟁 준비에 나섰다. 탕헤르는 1415년 당시 세우타의 총독이었던 살라 이븐 살라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복수를 열망하며[83] 그라나다에서 수입한 뛰어난 궁수들을 포함, 약 7천 명의 수비대를 갖추었다.[84] 탕헤르의 요새는 보강되었으며 세우타로 통하는 주변 산길도 봉쇄되었다.
5. 4. 원정
엔히크 왕자는 1437년 8월에 원정대를 이끌고 탕헤르로 향했다.[85] 원정대는 육로와 해상로로 나누어 이동했는데, 엔히크는 육로로 이동하여 9월 13일 탕헤르 외곽에 도착했고,[86] 해상으로 이동한 막내 페르디난드 왕자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탕헤르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87]10월 9일경, 모로코 마리니드의 섭정 아부 자카리야가 이끄는 대규모 지원군이 도착하여 전투가 벌어졌고, 포르투갈 군은 크게 패배했다. 엔히크 왕자도 위험에 처했었다.
포르투갈 원정군은 3,000명 정도만 살아남아[88] 모로코 지원군에게 포위되었다. 모로코는 포르투갈의 탈출로와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고[89] 고사작전을 펼쳤으며,[90] 포르투갈은 보급이 부족해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91] 굶주린 군대는 말을 잡아먹기도 했고, 우물도 턱없이 부족했다.[92]
5. 5. 퇴각
1437년 10월 17일, 엔히크는 군대의 안전 철수를 보장받는 대가로 세우타 반환을 약속하는 종전 조약을 제안했고, 이는 엔히크 왕자와 살라 이븐 살라에 의해 체결되었다.[93] 인질을 상호 교환한 후 10월 19일 포르투갈 원정대의 생존자들은 모두 배를 타고 탕헤르를 떠났다. 이때 교환된 인질 중에는 엔히크의 막내동생 페르난두 왕자가 포함되어 있었다.[94][95]5. 6. 귀국 후
탕헤르 원정의 대실패로 인해 그동안 세우타 정복(1415년)과 해양탐사를 통해 얻은 엔히크의 명성은 실추되고 입지가 좁아졌다.[96] 귀국 후 엔히크 왕자는 조약 파기를 주장하였다. 철수시 안전을 보장하기로 했으나 포르투갈군이 승선을 위해 이동 중 발생한 무혈충돌로 수십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96] 이는 모로코에 의해서 이미 조약이 깨어졌다는 근거라고 주장했다.[97] 그러나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두아르트 국왕은 레이리아에서 코르테스(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였다. 의회는 조약 비준을 반대하였고, 페르난두 왕자의 석방을 위해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페르난두 왕자의 석방을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98] 세우타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볼모로 잡혀있던 막내동생 페르난두는 1443년 6월 5일 모로코 포로 수용소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99][100]
6. 알파로베이라 전투
탕헤르 원정 실패로 세우타 정복(1415년)과 해양탐사를 통해 얻은 엔히크 왕자의 명성이 실추되고 입지가 좁아졌다. 엔히크는 귀국 후 조약 파기를 주장하였다. 철수 중 발생한 무혈충돌로 수십 명이 사망한 사건[96]을 근거로[97] 조약이 이미 모로코에 의해 깨어졌다고 주장했으나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두아르트 1세는 레이리아에서 코르테스(의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의회는 조약 비준을 반대하고 페르난두 왕자의 석방을 위해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하였고,[98] 세우타 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페르난두는 1443년 6월 5일 모로코 포로 수용소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99][100]
6. 1. 섭정권 분쟁

1438년 두아르트가 47세의 나이에 흑사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6살의 어린 아폰수 5세가 즉위하였다.[101] 두아르트는 유언장에 왕비 레오노르를 섭정으로 지목하였다.[101] 그러나 왕비는 정치적인 능력이 부족했고 특히 아라곤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점이 거부감을 불러일으켜 반대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 정서는 1383년 이후 28년간 이어진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형성된 국민적 감정이었다. 이를 의식한 왕비는 아폰수 5세의 숙부인 페드루와 행정과 사법권력을 나누어 공동 섭정을 하는 절충안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왕국 통치에 비효율적이었으며 1439년에 코르테스(의회)는 페드루의 단독 섭정을 결정하였다.[102] 왕비는 망명길에 올랐고 카스티야에서 1445년 사망하였다.
6. 2. 권력 투쟁
1438년 두아르트가 47세의 나이에 흑사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6살의 어린 아폰수 5세가 즉위하였다. 두아르트는 유언장에 왕비 레오노르를 섭정으로 지목하였으나,[101] 왕비는 정치적인 능력이 부족했고 특히 아라곤 출신의 외국인이라는 점이 거부감을 불러일으켜 반대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 정서는 지난 1383년 이후 28년간 이어진 카스티야와의 전쟁에서 형성된 국민적 감정이었다. 이를 의식한 왕비는 아폰수 5세의 숙부인 코임브라 공작 페드루와 행정과 사법권력을 나누어 공동 섭정을 하는 절충안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조치는 왕국 통치에 비효율적이었으며 1439년에 코르테스(의회)는 페드루의 단독 섭정을 결정하였다.[102] 왕비는 망명길에 올랐고 카스티야에서 1445년 사망하였다.
섭정 페드루는 귀족들의 권력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정국의 안정과 왕국의 번영을 추구하였다. 페드루의 정책에 가장 불만이 컸던 사람은 바르셀루스 백작 아폰수(1377~1461)로, 그는 주앙 1세의 서자이자[103] 섭정 페드루의 이복형제이다. 주앙 1세는 바르셀루스 백작을 총애하여 아비스 왕조의 개국공신인 누누 알바르스 페레이라의 무남독녀 베아트리스와 혼인시켰고, 이후 그는 페레이라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103]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가 낮다는 것을 문제삼아 가족 내에서 반목을 조장했으며,[104] 국왕 아폰수 5세의 신임과 권력을 얻고자 노력하였고 섭정 페드루의 권력을 질투하면서 그와 끊임없이 갈등하였다. 1442년 아폰수는 국왕으로부터 초대 브라간자 공작으로 임명받아 강한 권력과 부를 가진 대귀족이 되었다.
6. 3. 비극적 결말

페드루는 1445년에 자신의 딸 이자벨라를 아폰수 5세와 혼인시키며[103] 숙부이자 장인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섭정 페드루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브라간사 공작 아폰수는 국왕과 섭정 페드루 사이를 이간질했고, 1448년 6월 페드루를 섭정직에서 물러나 코임브라로 퇴각하게 만들었다.[103] 이간질은[132] 더욱 심해져 국왕은 섭정 기간 동안 시행된 모든 법령과 포고령을 무효화했다. 또한 페드루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 반란을 일으키도록 갈등을 증폭시켰다.
엔히크는 양측을 중재하여 갈등을 해소하고 권력투쟁을 종결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105] 결국 1449년 5월, 아폰수 5세와 페드루는 알파로베이라 전투에서 충돌했고, 숙부와 조카 간의 싸움은 페드루의 패배와 죽음으로 끝났다.[106] 엔히크는 국왕 편에 섰지만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105] 코임브라 공작이 사라진 포르투갈은 사실상 브라간사 공작이 통치하게 되었다.[106]
7. 북아프리카 원정
브라간사 공작이 장악한 포르투갈은 귀족 중심의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였으며, 이는 아폰수 5세(1438~1481)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국내 정치에서 약화된 왕권을 해외 원정을 통해 강화하고자 했다.[106]
1453년 오스만 튀르크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고, 교황 칼리스토 3세(209대 1455~1458)는 십자군을 호소했다.[107][108] 아폰수 5세는 적극 지원 의사를 밝혔으나, 1458년 교황 사망으로 무산되었다.[110]
포르투갈은 십자군을 위해 준비했던 군사들을 북아프리카 정복 사업으로 돌렸다.[106] 1458년, 엔히크는 원정대를 이끌고 알카세르세게르(Alcácer Cequer)를 정복했다.
8. 노예 무역
엔히크 왕자가 주도한 해양 탐사는 초기에는 경제적 이익이 없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막대한 비용이 소모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주앙 1세와 형 두아르트 왕, 그리고 조카 아폰수 5세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탐사는 계속될 수 있었다. 1440년대에 들어서 흑인 노예 무역과 금 거래가 시작되자 비난은 수그러들었지만, 엔히크 왕자는 탐험 사업으로 인해 많은 부채를 남기고 사망했다.[128] 그의 사후에는 미개척지 탐험에 대한 추가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이미 개척된 지역과의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1419년, 엔히크는 포르투갈 남단 알가르베 주의 총독이 되어 사그레스 곶에 항해 연구소를 설립했다. 이곳에서 항해사, 지도 제작자, 천문학자, 조선업자 등 전문가들을 모아 해양 탐사를 연구했다. 마데이라 제도는 1419년에 발견되어[38][39] 1425년부터 식민화가 진행되었으며, 주로 남부 알가르베 인들이 이주하여 크게 번영하였다. 초기에는 염료 추출용 재목과 밀이 생산되었고, 15세기 중반부터는 사탕수수 재배가 활성화되면서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수입했다. 15세기 말에는 유럽 설탕의 최대 공급지가 되었다.[42]
1427년에는 디오고 드 실베스가 아조레스 제도를 발견했다.[46] 아조레스 식민화 사업에는 스페인, 프랑스 등 외국인들의 이주도 수용하였다. 초기에는 자색 염료를 추출하는 카나리아이키를 생산하여 플랑드르 등지의 유럽 염료 공장에 수출하였다. 15세기 말부터는 밀을 경작하여 본국과 북아프리카 해안 지역에 수출했으며, 가축 사육도 활발했다.[47]
포르투갈은 탐험, 개척, 정복을 통해 확보한 북아프리카와 대서양 지역에 대한 독점적 무역권과 점령지에 대한 소유, 관리 권한을 교황청에 요청하여 인정받았다.[121] 교황 니콜라오 5세(208대 1447~1455)는 1452년 칙령(''Dum Diversas'')을 통해 사라센인[122]과 이교도들을 공격, 정복하고 점령할 수 있는 포르투갈의 권리를 인정했다.[123] 또한 아폰수 5세에게 사라센인, 이교도, 비기독교인을 세습 노예화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8. 1. 대서양 노예 무역
엔히크가 주도하는 해양탐사와 아프리카 개척은 경제적 실익이 없어 막대한 자금만 소모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441년 안탐 곤살베스가 금과 함께 10명의 아프리카 흑인들을 처음으로 포르투갈에 데려오자 이러한 비난은 잠잠해졌다.[111] 당시 식민지 건설이 진행되던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의 밀과 사탕수수 재배에[124] 노동력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112]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흑인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같은 해 모리타니 북부로부터 많은 노예들을 들여오기 시작했다.[113]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대서양 노예 무역이 시작되기 오래전부터 노예제가 흔한 일이었다.[114] 훗날 노예무역이 활성화되어 유럽인이 노예무역으로 유명한 아프리카 중부 서해안에 진출하기 전에도 그 지역 아프리카인들의 30~60%가 노예였다.[115] 이들은 백인들의 노예가 아니라 그 지역 지배계층 흑인들의 노예였다. 따라서 거래된 흑인 노예들은 백인 노예상들이 납치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 추장들과 거래를 통하여 들여왔다.[115]
1444년에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이자 해양 탐험의 전진기지로 사용되어온 라구스에 처음으로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노예 시장(Mercado de Escravos)이 생겼다.[125][116][113] 엔히크는 라구스에 '기네의 집'을 건립하여 이곳에서 노예교역이 이루어지게 하였으며, 수입 노예들의 20%를 세금으로 거두어 들였다.[117] 1456년에 카보베르데 제도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을 노예무역의 기지로 활용하였다.[118]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흑인노예 무역은 점차 활성화되었고, 16세기에 이르러서 리스본의 인구 중 10%는 아프리카 흑인일 정도였다.[125][119][120]
8. 2. 노예 무역의 정당성
교황 니콜라오 5세(208대 1447~1455)는 1452년에 칙령(''Dum Diversas'')을 통해 사라센인[122]과 이교도를 공격하고 정복하여 점령할 수 있는 포르투갈의 권리를 인정했다.[123] 또한 아폰수 5세에게 사라센인, 이교도, 비기독교인을 세습 노예화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이는 레콩키스타와 북아프리카 원정 중 생포된 포로들의 노예화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한 조치였다. 노예화는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이교도와 불신자를 줄이는 차원에서 실시함으로써 종교적,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노예들을 강제 개종시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았기에[124] 이교도 아프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데려오는 것을 인정했다.[125] 교황 니콜라오 5세는 1455년에 공포한 로마누스 폰티펙스 칙령을 통해 칙령의 내용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교황의 칙령들은 이후 노예 무역과 유럽의 식민지 활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9. 사망
엔히크는 1458년 알카세르세게르 원정에 성공한 후 귀국하여 2년 뒤인 146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바탈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0. 평가
'항해왕'이라는 별칭은 19세기 독일 역사학자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고, 영국 작가들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포르투갈 저술가들은 이 별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데, 엔히크가 직접 항해에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128] 엔히크는 탐험 사업에 과도하게 투자하여 많은 빚을 남겼고,[128] 그의 사후 미개척지 탐사는 중단되었다.
주경철 교수는 자신의 저서 《대항해 시대》에서 엔히크를 영웅화하기보다는 포르투갈 사회 전체의 발전을 강조하는 새로운 설명을 제시했다.[129]
엔히크는 그리스도 기사단장으로서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했지만, 세속적인 쾌락을 절제하지 않아 사생아 딸이 있었다.[131] 그의 친형 두아르트는 엔히크의 낭비벽과 무질서한 습관 등을 비난했다.[132] 이는 엔히크가 종교와 탐험 사업 외에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는 고상하고 금욕적인 인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엔히크 항해왕자의 초상화는 검은색 샤프롱(Chaperon (headgear)|샤페론영어)을 쓴 콧수염이 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기네 정복지』의 삽화와 "최선을 다하라"는 표어, 그리고 『상 비센테 제단화』의 동일 인물 묘사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인물이 두아르트 1세와 더 닮았으며, 엔히크는 그리스도 기사단의 복장을 한 다른 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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